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문단 편집) == 제작 과정 == * 제작 발표 1934년 6월에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처음으로 제작할 장편 영화에 대한 발표가 언론에 게재되었는데, 월트 디즈니는 같은 해에 스튜디오의 직원들을 불러 이번에 제작할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장편 영화로 발표할 것임을 밝힌다. 같은 해에 [[월트 디즈니]]를 비롯해 여러 스태프들이 모여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 과정이 몇 차례 진행되어 스토리 개발 과정은 몇 개월이나 지속되었다. * 각색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일곱 난쟁이들에게 좀 더 개성을 불어넣었으며, 잔혹한 내용을 최소화하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독사과를 먹고 쓰러진 백설공주를 보고 좋다며 낄낄거리는 왕비를 보고 숲속 동물들이 난쟁이들에게 연락하고, 연락을 받아 귀환한 난쟁이들에게 쫓겨 계모가 절벽에서 추락사한다. * 테크니컬러 기술 활용 월트 디즈니는 1932년 테크니 사에서 개발한 3색 테크니컬러 프로세스 활용에 대해 1935년까지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한다.[* 그 영향으로 인해 [[워너 브라더스]], [[유니버셜 픽처스]], [[파라마운트 픽처스]], [[컬럼비아 픽처스]], [[MGM]] 등의 타 영화사들은 몇년간 2색 테크니컬러나 시네컬러 기술을 애니메이션에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루니 툰]]의 메리 멜로디즈는 1934년 초에 컬러화되었지만 디즈니와의 독점 계약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질이 좋은 3색 테크니컬러 기법을 제작진 측에서 사용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 기술을 이용하여 선명하고 질 좋은 컬러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미국 영화]]에 컬러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한 연도는 1917년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컬러 기술이 도입된 이후로 2색 테크니컬러를 기법을 활용한 컬러 영화들이 속속 개봉했지만[* 밀랍 인형 박물관의 살인사건이 대표적이다.], 컬러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극장에서조차 컬러 스크린으로 다양한 색상과 선명한 화질을 보기 힘들었다. 컬러 염색이 기술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지금도 초창기 컬러 영화의 색감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염색 작업을 진행해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고 한다. 돈과 시간이 들어 작정하고 복원하지 않으면 시간으로 노화된 컬러 프린트를 쓰는 경우가 잦다. [[존 휴스턴]]의 [[모비 딕(소설)#s-10.1|모비 딕]]이 대표적.] [[파일:external/ferdyonfilms.com/Sharp%208.jpg|width=300]] 예시로, [[1935년]]에 개봉한 영화 중 하나인 '베키 샤프'는 3색 테크니컬러로 제작된 영화이다. 그러나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해 색상과 화질의 수준은 사진과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 때문에 한 평론가는 이 영화를 '마요네즈에 절여놓은 연어 같다'고 평했다. 그리하여 실사 영화에서 컬러가 대세가 된 건 전후 1950년대부터였다.[* 전쟁이 끝난 1945년에 발표한 [[진 티어니]] 주연의 그녀를 천국에(Leave Her to Heaven) 같은 영화나 [[파웰과 프레스버거]] 연출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면 색감 기술에서 확실히 발전했다는걸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g-ecx.images-amazon.com/SnowWhite8.gif|width=300]] 그런데 [[1937년]] 극장에서 선명한 색상과 화질을 가진 캐릭터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이 돌아다닌 것이다. 이는 당시 영화계에 엄청난 [[문화충격]]을 주었고, 이후 테크니컬러를 사용한 영화들은 반드시 광고 포스터에 "테크니컬러 사용(in Technicolor)"이란 문구를 넣었으며, 한국에서도 이를 "총천연색"이라 번역하여 극장 광고에 사용하였다. * 특수기법 사용 동작 프레임에도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 캐릭터의 움직임이 지금 봐도 매우 부드럽다.[* [[로토스코핑]] 기법과 비교되기도 한다. 정확한 기법은 다르더라도 로토스코핑 기법과 비교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인 것은 사실이다.] 컬러 영화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고, 특수효과라고 할만한 요소들이 들어간 [[오즈의 마법사(영화)|오즈의 마법사]] 같은 영화가 나온 것도 [[1939년]]이었으니, 당대의 전세계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여기에 큰 충격을 받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끼친 영향은 [[2009년]]의 [[아바타(영화)|아바타]] 이상이었다고 봐도 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역사를 살펴볼 때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 [[픽사]]나 [[드림웍스]] 같은 현대의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애니메이터들조차 이 작품을 연구용으로 보곤 한다. * 막대한 제작비 한편, 워낙에 혁신적인 시도였던 까닭에 제작비를 많이 잡아먹어 월트 디즈니는 이 작품을 만드는 동안 몇 번이고 파산하는 바람에 직원들 월급도 못 줄 정도였는데 월트가 설득하자 이 작품의 제작에 애착이 큰 직원들도 자진해서 월급일을 미뤄가며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의 제작 방법으로는 이렇게 '''끔찍하게 돈 많이 드는''' 방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이 [[오파츠]]인 것이다. 제작비는 당시 기준 149만 9천 달러로 엄청난 거액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600만 달러[* [[영어 위키백과]]에는 600만 달러는 과장이고 실제 제작비는 약 385만 달러로 나온다. 그래도 이 정도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다.]로 만들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걸 생각하면... 어렵게 만든 보람이 있게 흥행은 대성공이라 80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개봉 당시 뉴욕 극장가에 5주간이나 걸렸다고 한다.], 재개봉도 여러 번 해서 1억 8,492만 달러라는 극장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 수익을 [[2020년대]] 물가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21억 달러''' 가까이 된다.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인 [[겨울왕국 2]]과 7억 달러 이상 차이가 난다. 그렇기에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역사상 가장 흥행한 애니메이션'''이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월트의 수완이 빛난 것이, 그는 자신이 들인 막대한 제작 기간과 비용, 그리고 노동력을 이슈화하여 오히려 홍보의 기회로 삼았다. 1937년 5월 초 [[뉴욕 타임즈]] 지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느릿느릿 만들어 나가는 작품'이라고 비교할 정도였으니... 시사회 즈음에 이르러서는 신문은 물론이고 라디오[* 월트 디즈니는 홍보 매체로 신문보다 라디오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백화점[* 어린이 장난감 코너에서 백설공주를 소재로 한 인형극을 선보인다든가.]을 통해 홍보에 총력을 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